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노우라 전투 (문단 편집) == 헤이케의 멸망 == [[파일: E891B07D-43DA-46A6-B230-E7A0FB43257A.png]] 그러나 물결이 바뀌고, 요시츠네가 당시는 비전투원으로 취급되어 살상행위의 대상이 아니었던 노잡이/키잡이를 조준사격하라고 명령하여[* 이 부분은 학자에 따라선 약간 창작이 섞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겐지 군이 당시로서는 비인도적인 행위를 한 것은 맞는데, 요시츠네가 그것을 직접 명령한 부분이나 그것으로 전세를 뒤엎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여담으로, 이 부분은 역시 요시츠네가 악당으로 묘사된 불새에서는 훌륭한 민간인 학살 행위로 묘사된다.] 전세가 뒤집혔다. 요시츠네는 헤이케의 맹장이[*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다이라노 노리츠네(平敎經)로 나오는데,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활을 쏘아 겐지 측 무사들을 쓰러뜨리며 화살이 떨어진 뒤에는 양손에 칼을 들고 싸우다 "패배가 확실해진 판인데 부질없는 살생은 그만두지 그러냐." 하는 사촌형제 다이라노 토모모리의 말에, 어차피 죽을 바에는 적의 사령관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함께 죽을 생각으로 배와 배를 오가면서 요시츠네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요시츠네를 발견하고 그와 전투를 벌이려는 찰나에 요시츠네는 배 8척 정도의 거리를 뛰어 도망쳐버렸고, 노리츠네는 갑옷도 투구도 벗어던진 채로 "누구든지 와서 나를 잡아봐라. 가마쿠라로 가서 요리토모에게 한마디 해줘야겠다." 하며 겐지군을 도발, 자신에게 뛰어든 (성인 남자 30명과 맞먹는 힘이 있다는) 무사 세 명 가운데 한 명을 발로 차서 바다에 처넣고 남은 두 명은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네놈들은 이제 나와 함께 황천으로 가자꾸나."라며 바다에 뛰어드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다만 군담소설과는 달리 가마쿠라 막부의 정사인 《[[아즈마카가미]]》에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하여, 단노우라 전투에서 요시츠네와 싸웠다는 이야기와는 대치된다. 이미 당대 구교들의 일기에서도 "수도 제일의 무사"로 소문이 자자하던 노리츠네만큼은 이치노타니에서 죽지 않고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단노우라 전투에서 전사한 헤이케 측 무장의 명단을 보고할 때에도 노리츠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2005년에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요시츠네'는 이 점을 감안한 것인지 요시츠네를 쫓아다니며 그가 배 8척을 뛰어다니게 한 헤이케 측 무사를 다이라노 토모모리로 변경했다. 그래서 항목 상단의 요시츠네의 동상에서 요시츠네를 노리는 헤이케 측 장수로 토모모리가 조각되어 있다.] 육박전을 걸어 오자 배 사이를 펄쩍 뛰어서 순식간에 8척의 배를 뛰어 건너서 도주하는 묘기를 선보였는데, 이게 그 유명한 [[팔척뛰기]](八艘飛び) 고사다. 헤이케의 주장이던 [[타이라노 토모모리]]는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GG|볼 것은 다 보았다]]" 라는 말을 남기고, 갑옷을 두 벌 껴입고 닻을 짊어진 채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사령관이던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시녀, 헤이케 일족의 여자들, [[미쿠사노카무다카라|삼종의 신기]]를 껴안은 [[안토쿠 덴노]]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지만 죽기 무서워졌는지 허우적거리다가 살아나 구조됐다가 이후 처형된다. 극도의 무능함으로 헤이케의 패인이 된 무네모리에 우호적인 서술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 사서에는 대부분 '''죽으려고 뛰어들었는데 뛰어들어 보니 죽기 무서워져서 헤엄쳐 살아났다'''든지, '''비만으로 인해 잠수해 죽으려고 해도 자꾸 물에 떠올라서, 그러다 잡혔다'''고 써 있다. 안토쿠 덴노는 외할머니인 니이노아마[* 본명은 도키코로 무네모리의 어머니이자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두 번째 정실이다. 키요모리 생전에 출가해서 여승이 되었는데, 쥬니이(종2품) 상당의 관위가 있었기 때문에 니이노아마라고 불린다.] 와 함께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니이노아마는 이제 어디로 가냐는 덴노의 질문을 받자, '''"아미타불의 정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파도 속에도 도읍이 있나이다."'''라는 비감 어린 유언을 남기고는 세상에 하직인사를 한 뒤, 덴노를 끌어안고 투신했다고 전해진다. 덴노의 모후인 [[타이라노 도쿠시|도쿠코]]도 뒤따라 뛰어내렸는데, 구조되어 전후 비구니가 되었다.[* 도쿠코가 출가하여 보낸 세월은 [[헤이케모노가타리]]의 결말 부분에 다룬다. 그녀는 1191년 혹은 1215년 죽었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모른다.] 이로써 헤이케는 완전히 멸망했다.[* 단노우라 근처에는 헤이케의 패잔병들이 해변에 밀려와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고 죽었다는 우물이나, 닻을 짊어진 토모모리, 팔척뛰기를 선보이는 요시츠네 등의 동상이 남아있다.] 이후에도 [[도깨비게]][* 이런 일화는 [[미국]]의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의 저서인 [[코스모스(책)|코스모스]]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여기에 더해서 후술하는 [[도깨비게]]의 전설과 연계하여 인위선택을 설명하기도 했는데, 현재 [[생물학]]계는 도깨비게는 인위선택과 무관한 것으로 보고, 칼 세이건의 가설을 부정하고 있다.][* 다만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칼 세이건]]이 이 책을 쓰던 시기는 1970년대 말이다. 그의 전공인 [[천문학]] 내용조차 세월 앞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가설이 뒤바뀌며 현재는 책의 내용과 완벽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일례로 세이건은 그의 서적에서 [[우리 은하]]를 [[안드로메다 은하]]와 비슷한 모양이라고 언급하지만 우리 은하가 안드로메다 은하와 달리 막대 나선 은하임이 밝혀진 것은 서적 집필 수십년 뒤인 2005년이다.) [[칼 세이건]]은 오히려 책에서 이러한 과학적 사실들은 후손들이 얼마든지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거나 가설이 바뀌며 폐기된 가설이 될 수 있다며 그것이 바로 [[과학]]의 매력인 것으로 언급한다.] 등 헤이케 잔당에 관련한 각종 전설이나 헤이케의 후손을 자칭하는 여러 호족[*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아들 중 한 명인 스케모리의 후손을 자칭한 [[오다 노부나가]] 등.]이 각지에 나타나지만 헤이케의 정권은 다신 나타나지 못했으며, 겐지가 막부의 통치권을 쥐게 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아시카가 다카우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쇼군직을 계승하려면 세이와 겐지(청화 원씨)의 후계여야 한다는 암묵의 룰이 생기게 되었고, 후대에 가면 쇼군이 겐지 당주{겐지 쵸쟈(源氏長者)}까지 겸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설, 이 때문에 비천한 신분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사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위인 쇼군 직에 취임할 명분이 없자 그냥 '''쇼군직을 폐지'''하고 조정 최고 직위인 태정대신의 자리에 올랐다는 설이 있지만, 겐지 이전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겐지가 아님에도 정이 대장군에 취임했고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 요리토모의 혈통이 단절된 뒤에는 후지와라씨나 친왕이 쇼군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쇼군이 겐지여야 한다면, 헤이시의 후계를 칭한 오다 노부나가가 쇼군 취임을 제안받은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겐지 출신만이 쇼군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성문법도, 불문법도 아니고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낭설에 불과하다. 굳이 좋게 평가해준다면 막부가 수립된 이후의 일본에서 쇼군은 겐지 출신이 역임한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히데요시도 본인이 그저 조정의 관직을 차지해 새로운 형태의 정권을 만든 것일 뿐, 신분이 비천해서가 아니였다. 일본 관계에서 관백은 쇼군 따위보다 훨씬 더 격이 높은 관직이고 후지와라씨와 격이 높은 대귀족이 아니고서는 역임할 엄두도 못 내는 초상위 관직이다. 히데요시의 정권 수립 과정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무사 출신에 귀족도 아닌 히데요시가 쇼군이 아니라 관백이 된 것이 더 문제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